적극적으로 시도되어야하는 일거리
유치해서도 남용해서도 안되지만
점진적인 변화, 그 시각적 자극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조용한 무대 위의 무희처럼…
과거 국가는 북방 경계를 따라서 새로운 주거지를 조성하였다.
그것을 통하여 공권력의 공백을 매우고, 물샐틈없는 경계를 가능케 하였다.
도시는 여러가지 기능을 가지는 구역들로 구성되며,
그리고 이러한 기능들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를 가진다.
하지만 지금 도시에서는 기능들이 서로 섞이며, 파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도심공동화이다. 이것은 해결해야할 결점으로 인식되어졌다.
새로운 도시계획은 도시 곳곳에 주거지를 배치하여, 망루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도심 곳곳에 복합건물이 세워졌고, 도시 어디에나 사람이 살게 만들었다.
도심공동화는 지극히 비약되고, 수단화되어 해석되어졌다.
공동화해결로 부족한 공권력을 극복하였다. 하지만 도시체계는 무너졌다.
가득하고 활기차다. 하지만 질서는 없다. 혼란이다.
이것이 문화인지, 문제인지 생각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그리고 도시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도시는 이미 삭막하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을 잃어버렸다. 말그대로 휘저어버렸다.
시간이 쌓아 놓은 것들, 경험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잃었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이미 지금은 나에게 너무 익숙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잡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물도 아닌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않은 애매한 존재.
물질이 산화하듯 인간도 항상 반응하고 변화해간다.
금처럼 완전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존재인가?
반응은 과정을 만들고 과정은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지금은 유지되기 힘들다.
시험관 속 물질처럼 왜 우리는 반응하는가?
본능적으로 자극에 따라서, 혹은 스스로를 자극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극과 반응.
끊을 수 없는 굴레 속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변화의 큰 흐름을 작은 티끌이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티끌은 또다른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지구의 구성물질 중의 하나, 표면의 이끼같은 존재.
하지만 본능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군더더기가 없다. 치장이 없다. 간단하다.
정직하다. 믿음직하다. 합리적이다.
높게 솟은 시어즈타워는 50층은 더 올릴 수 있을만큼 안정적이다.
미스의 건물은 수학공식과 같은 명료함으로 소름을 돋게 만든다.
건축물에서부터 실생활의 작은 부분 그리고 보이지않는 규율에까지
축척된 경험으로부터 나온 정신이 보인다.
보여지기 위한 몸부림도 없다. 소모적인 경쟁도, 자신감 없는 모방도 없다.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그 합리성은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만 하다.
결과물은 그들의 정신의 표현이며, 그들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물론 현대의 건축물들은 겉보기에 뻔하도록 명료해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시작은 같으며, 정신을 품은 그 곳으로부터의 진화이다.
지금의 나의 사상에 얼마나 떳떳한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나는 살아있는가…
정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가 지극히 간단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뻔한 결과도, 뻔히 보이지는 않는다.
건축물의 감각적인 해석은 그 본질을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똑같은 형태, 똑같은 재료 속에는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이 있다.
생각의 방향은 시작부터 다르며, 물질은 다양한 정신과 문화를 구현한다.
사람이 한 국가에서 자랐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특징적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공통적인 생각은 지역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지역적 특징을 파악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외국인이 한 국가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수없는 도시, 알수없는 국가….. 모른다고 무책임하지 말자.
보이지 않는것… 그것이 정체다.
공용공간의 유지에는 많은 비용과 노력과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인 발생은 쉽지 않다.
도시속에서 공용공간은
한발짝 물러서는 양보와 용기로 만들어진다.
나아가느냐 물러서느냐 선택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시의 특징으로 남는다.
도시민의 관습과 습성은 도시의 구조로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도시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적 성숙도와 경제력과 같은
상황의 반영이 정답을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이 더 좋은지 더 나쁜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현실은 냉정하게 공공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하지만 그 냉정은 성숙하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다.
건축에서 생태를 논의한다는 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이다.
생태는 도시적 차원에서 이미 다루어졌어야한다.
도시는 자연 위에 놓여져야하며
생태도시 없는 생태건축은 영원한 미봉책이다.